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앞둔 가운데 KB·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금융그룹이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 돌입했다. 전통 금융권이 디지털자산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이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전날 NH농협은행은 해외 방문 관광객이 물건을 구매한 뒤 돌려받는 부가가치세 환급 절차를 디지털화하는 ‘택스리펀드 디지털화 시범사업(PoC)’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이번 시범사업은 기존 환급 절차를 블록체인 기술로 자동화해 기관 간 정산에 스테이블코인을 적용해 실시간 환급 체계를 구축하는 게 핵심이다.
또한 농협은행은 오픈블록체인·DID협회(OBDIA) 회장사로서 민간 차원 기술 표준화와 정책 협의를 주도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디지털전략사업부 내 블록체인팀을 중심으로 스테이블코인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농협을 비롯한 5대 금융그룹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사업은 향후 제도권 안으로 들어올 것을 대비한 선제적 대응의 일환이다.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보관·결제·투자상품까지 연결되는 디지털 밸류체인의 새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서다.
5대 금융그룹 가운데 신한금융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실사용을 위한 구체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신한은행은 다음달 자사 배달 플랫폼 ‘땡겨요’에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를 도입하기 위한 PoC(타당성 증명 실험)를 검토 중이다.
앞서 신한은행은 롯데그룹 통합 멤버십 엘포인트를 운영하는 롯데멤버스와도 상용화를 논의하기도 했다. 이는 포인트 결제망을 갖춘 롯데멤버스 인프라를 활용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실생활 결제 가능성을 점검하려는 취지로 풀이된다.
하나금융도 그룹 차원에서 국내외 파트너사와 스테이블코인 발행부터 유통, 관리 등에 대한 PoC를 진행 중이다.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하나금융은 이달 은행과 카드사·증권사를 포함해 전 계열사가 참여하는 디지털자산 전담 TF를 지주사에 신설했다.
디지털자산TF장에는 박근영 하나금융TI 대표를 선임했다. 하나금융TI는 그룹 IT전문 자회사로, 박 대표는 하나금융 디지털 전략을 총괄해온 핵심 인물이다. 박 대표는 지난 2021년 선임돼 하나금융 계열사 대표들 중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킨 만큼 함영주 회장의 신임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하나금융은 가상자산거래소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와 접점을 넓혀가고 있다. 지난 7월 이은형 하나금융 부회장이 김형년 두나무 부회장과 베트남 총리를 만나는가 하면, 9월에는 달러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테더와 만남에서 이 부회장과 박 사장, 김 부회장이 모두 동행했다. 업계에선 스테이블코인 협력, 업비트와 실명계좌 제휴 등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우리금융은 금융사 중 가장 빠르게 구체화된 모델을 제시한 곳으로 평가된다. 우리금융은 가상자산 수탁 기업 비댁스와 원화 스테이블코인 ‘KRW1’을 선보였다. KRW1은 1코인을 1원에 연동되도록 설계됐으며, 담보금도 100% 원화로 구성돼 우리은행 계좌에 예치된다. 송금·결제·투자·예치 등 금융 전반에서 활용할 범용 스테이블코인으로 발전시키는 게 목표다.
이와 함께 그룹 전체가 참여하는 스테이블코인 밸류체인 구축도 내부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우리은행이 발행·커스터디를 맡고, 우리자산운용은 관련 상품 개발을, 우리투자증권은 브로커리지를 담당하는 구조를 구상하고 있다.
KB금융은 지난 5월 그룹 차원에서 ‘가상자산 대응 협의체’를 운영하고, 이후 해당 조직 내 스테이블코인 분과를 상설 조직으로 전환했다. KB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소상공인과 상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등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추진 중이다.
이종섭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시스템 안에서만 머물던 결제·정산 구조로는 글로벌 블록체인 기반 결제망과 연동하기 어려워 국제 표준에 맞춘 협업 모델을 미리 익히고 준비할 필요가 있다”며 “해외 금융사들은 자회사를 통해 블록체인 실험을 진행해 국내 은행도 이 사례를 바탕으로 기술과 운영 역량을 쌓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은행의 역할에 대해선 “한국은 자본시장이 얕고 유동성 있는 국채가 많지 않아 초기 스테이블코인은 예금을 담보로 발행될 가능성이 크다”며 “결제 안정성과 담보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은행 역할이 상당히 중요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IT 조선 / 정서영 기자
원문 : https://it.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3092150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