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역 인근 피부과 대기실에 일본어와 중국어가 뒤섞인다. 코로나19 이후 끊겼던 외국인 발길이 돌아오면서, ‘K-뷰티’와 디지털 결제가 결합된 새로운 관광 풍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낮 12시가 조금 지난 시각, 강남역 사거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미용·피부·성형 간판이 빽빽하다. 각국 언어로 된 안내문과 외국인 관광객의 캐리어가 눈에 띈다. 몇몇은 스마트폰 예약 문자를 확인했고, 다른 이들은 병원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외국인 손님 절반”…다시 살아난 강남 의료관광
점심 무렵 강남역 사거리 근처 피부과 대기실. 평일 오후에도 사람들로 가득한 병원 안에는 일본어와 중국어가 섞인 대화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보톡스와 레이저 시술을 마친 관광객들이 시술 후 주의사항을 묻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이곳에서 수 년째 근무 중이라는 상담실장 이모씨는 “요즘 하루 방문객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라며 “피부 관리나 시술을 여행 일정의 일부로 넣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진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던 중국인 관광객 카오쉐(Cao Xue·31) 씨는 “한국의 피부 시술은 중국에서도 아주 유명하다”며 “예전부터 꼭 한번 받아보고 싶어 휴가를 내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병원 앞에서 친구와 인증사진을 찍은 뒤, 인근 카페로 향했다.
코로나19 이후 멈췄던 의료관광 시장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올해 방한 외국인 수는 팬데믹 이전 수준에 근접했고, 특히 중국·일본·동남아 관광객 중심으로 외국인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K-뷰티’와 의료시술 시장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알리페이 부터 와우패스까지 결제 다변화에도 한계 뚜렷⋯스테이블코인 주목
외국인 환자가 늘면서 결제 방식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강남 주요 병·의원과 상점에서는 와우패스(WOWPASS), 알리페이(Alipay), 위챗페이(WeChat Pay) 같은 해외 간편결제가 일상화됐다.
와우패스는 16개 통화를 충전해 교통·쇼핑·식음료 결제가 가능한 외국인 전용 선불형 카드다. 발급비는 5000원, 최소 충전금도 5000원으로, 환전소를 찾을 필요가 없어 관광객 사이에서 필수 아이템처럼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의료시술처럼 결제금액이 큰 경우엔 한도가 걸림돌이다. 1회 충전 한도는 약 10만원 수준으로, 수백만원대 시술에는 불편이 따른다.
이 같은 제약을 보완할 대안으로 스테이블코인 결제가 주목받고 있다. 달러나 엔화 등 법정화폐에 1대1로 연동돼 가격 변동이 거의 없고, 국경 간 송금이나 환전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보다 저렴하고 범용적인 결제 수단”으로 스테이블코인을 꼽는다.
김경업 오픈에셋 대표는 “신용카드가 없는 외국인이나 현금 결제가 번거로운 관광객에게 스테이블코인 결제는 실용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수수료가 낮고 결제 속도가 빨라 의료·숙박 업계에서도 관심이 크다”고 말했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나 엔화 등 법정화폐에 1대1로 연동된 디지털자산으로, 환전이 필요 없고 송금 속도가 빠르다. 업계에 따르면 블록체인 결제를 활용할 경우 수수료는 0.1~0.5% 수준으로 줄어든다.
와우패스 “스테이블코인 월렛·ATM 서비스 준비 중”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기대는 결제업계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의료관광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강남에서는 이미 외국인 결제의 절반 이상이 모바일로 이뤄진다. 이런 흐름을 감지한 와우패스 운영사 오렌지스퀘어가 한발 먼저 움직였다.
이 같은 흐름에 맞춰 와우패스 운영사 오렌지스퀘어는 스테이블코인(USDC·JPYC 등)을 앱에 충전해 원화로 환전하고, 이를 국내 결제·교통카드·ATM 인출에 사용할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 월렛 및 ATM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기존 선불형 카드에서 한 단계 진화한 형태다. 이장백 오렌지스퀘어 대표는 “스테이블코인은 달러나 엔화에 연동돼 환율 수준의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글로벌 통용이 가능하다”며 “여행 결제 수단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말했다.
미용 의료 현장에서도 이런 변화를 반긴다. 강남의 한 피부과 전문의 윤모씨는 “외국인 고객 비중이 높아지는 만큼, 카드 결제보다 수수료가 낮고 환전이 필요 없는 스테이블코인 결제가 상용화되면 병원도 환자도 편할 것 같다”며 “상용화가 이뤄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도적 뒷받침은 여전히 더디다. 현장에서 결제 실험은 시작됐지만, 법적 지위와 규제 기준이 정리되지 않아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럼에도 업계는 미용 의료시장을 원화 스테이블코인 산업의 새 기회로 보고 있다.
강남에 위치한 디지털자산 기업 관계자는 “한류 문화, 의료, 외식 등 외국인 대상 산업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기반 비즈니스 모델이 충분히 가능하다”며 “다만 법제화가 늦어 실제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금융당국은 디지털자산 이용자 보호법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한 디지털 결제수단의 법적 지위는 명확하지 않다. 결제 서비스 사업자 요건, 세금 부과 기준, 자금세탁 방지 규정 등 세부 항목이 정비돼야 실사용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김경업 대표는 “결제 관련 사업 아이템은 이미 충분히 많지만, 제도화가 늦어 실질적인 진전이 어렵다”며 “가장 큰 걸림돌은 규제”라고 말했다. 이어 “금융규제 샌드박스나 혁신금융 서비스 제도가 열려 작게라도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며 “작은 규모라도 실증 사업이 허용된다면 시장 확산은 빠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블록미디어 / 김해원 기자
원문 : https://www.blockmedia.co.kr/archives/1002164